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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은 어렵더라도 국민의 생활은 더 나아지게 할 수 없을까? 물질이 풍족하지 않아도 씩 웃고 있는 중남미 국가 사람들의 삶을 보면 소득과 행복 사이에 절대적인 비례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응답하라 경제학자여!"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경제학자를 데려와 세계경제의 무기력증을 치유하고 위로받고 싶은가. 그 삶에서 성숙한 조화와 절제의 향기가 느껴지는 폴 새뮤얼슨은 어떤가.

 새뮤얼슨은 시장을 중시하는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부의 개입을 중시하는 케인즈를 지지했습니다. 신고전학파종합이론을 집대성한 그는 어느 한쪽의 이념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에 늘 귀를 기울였습니다. 경제학자로서 국민의 후생을 위해 다양한 목소리를 모아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역할이랄까. 그는 지휘할 때 오른손의 역할과 왼손의 역할을 제대로 파악한 경제학자였습니다.

 

 시장과 국가의 온전한 역할을 강조한 새뮤얼슨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은 무엇일까? 그는 방정식을 풀듯 세상사를 단순화된 해법으로 해결하려는 경제학의 세계에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식에는 다양한 시각차가 있을 수 있음을 일깨우는 학자입니다. 그에게서는 여러 문제들을 현명하게 아우르는 향기가 느껴집니다.

 세상의 여러 현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존재합니다. 누군가는 그걸 '명과 암'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세계화 덕분에 중국과 인도 같은 개발도상국들이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는가 하면, 얼마전까지는 높은 원자재 가격과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호황을 누리던 중남미 국가가 현재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새뮤얼슨은 세계화의 '명'외에 '암'이 될 수 있는 양극화의 단면을 일찍이 간파했습니다. 그는 자본가나 숙련된 전문가는 세계화의 승자로 이득을 취하는 반면, 비숙련 노동자나 블루칼라 공장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거나 실질 임금 인상이 어려울 거라는 사실을 직시했습니다. 이는 미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세계화로 인해 이익과 손실이 공평하게 공유되지 않으면서 미국 사회도 점점 커지는 불평등을 경험할 거라고 경고했습니다. 세계화와 기술진보가 인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일자리를 앗아가고 낮은 임금으로 부의 양극화를 조장하는 어두운 면 또한 있음을 조명한 것입니다.


 새뮤얼슨은 '행복은 욕망 분의 소유'라고 간단히 정의했습니다. 행복을 결정하는 두 가지 요소가 소유와 욕망인데, 욕망이 일정하다면 소유가 커질수록 행복해지고, 소유가 일정하다면 욕망이 적을수록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문이 듭니다. 경제학 교과서를 처음 접할 때 마주치는 구절이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이를 충족하는 재화는 유한해서 경제문제가 생긴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다면 새뮤얼슨이 말하는 행복은 수학적으로 0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폴 새뮤얼슨은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지 않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그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노력이 지금의 물질적인 진보를 이루게 한 요인인 것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새뮤얼슨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는 아무리 개인의 소유가 늘어도 욕망이 도를 지나쳐 탐욕이 되면 불행해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빵은 몇 개 이상 먹으면 배가 불러 더 이상 못 먹지만 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쇼펜하우어가 돈에 대한 욕망의 무한성을 설파했겠습니까. 그는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목마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소비에 중독된 사람들, 너무 부자라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어찌 보면 삶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이 꼭 소득 수준만은 아니라는 것을 부자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식탁 위의 경제학자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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