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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이야기

공격받는 달러화

*서툰사람* 2016. 9. 27. 00:00

 유로화의 등장은 전세계 금융 시스템에서 권력의 균형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예측과 기대를 불러왔다. 유럽 주요 국가들은 경제블록을 만들어 유로화라는 단일 통화를 출범시켰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의 GDP는 미국에 필적할 만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로화가 등장할 때까지 달러화와 견줄 만한 경쟁 통화는 없었다. 영국의 파운드화나 독일의 마르크화, 일본의 엔화 같은 다른 통화들은 달러화에 크게 뒤처지는 2위 통화였다.

 유로화는 1999년 1월 1일에 만들어져 2002년부터 동전과 지폐가 유로준 초기 회원국 12개국의 통화를 대체해 통용되기 시작했다. 통화 통합은 유럽의 궁극적인 통일에서 핵심적인 과정으로 여겨졌고, 유럽의 경제력과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되살아날 것으로 전망됐다.

 유로화가 등장한 뒤 달러화가 빠르게 지지 기반을 잠심당하자 일련의 상황들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유럽연합 내부는 물론 유럽연합과 다른 국가 사이의 무역까지 확대되면서 유로화는 국제 무역 거래의 주요 결제통화로 빠르게 부상했다.

 준비통화로서 달러화의 지배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 중의 하나인 외환 보유액 내 달러화 비중은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단 4년간 6% 포인트가 떨어졌고 유로화의 비중은 그만큼 올라갔다. 이런 현상은 큰 흥분을 자아냈지만 실상을 따져보니 달러화 비중의 하락은 모든 외환보유액이 달러화 가치로 표기되는 데 따라 나타난 결과였다. 유로화 비중의 뚜렷한 상승은 외환보유액의 일부를 달러화에서 유로화로 바꿨기 때문이 아니라 달러화와 비교한 유로화의 가치가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지배력을 확보해가던 유로화의 추동력은 곧 정체됐고 전세계 외환보유액에서 유로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30% 한계선을 넘지 못했다. 외환보유액에서 미국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 몇년간 62%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면 유로화의 비중은 24%로 떨어졌다. 유로존은 현재 달러화 지위에 도전하는 것은 고사하고 유로존 체제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이다.

 미국 달러화는 다른 측면에서도 공격을 받았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2000년대 들어 빠르게 성장하면서 신흥국 통화들이 달러화의 영역 일부를 잠식해 들어올 만한 위치에 서게 됐다. 

 달러화의 시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글로벌 금융위기 동안과 이후에 예상치 못했던 몇 가지 반전이 펼쳐진다. 실제로 지금은 당분간 달러화의 시대가 공고하게 유지될 것처럼 보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금융위기는 달러화의 위상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결정타로 달러화를 전세계 금융시장의 지배적인 지위에서 끌어내려야 했다. 금융위기는 미국의 주택시장과 금융시장이 거의 붕괴직전에 몰리면서 촉발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러화를 퇴위시키는 과정에서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1장에서도 설명했지만 미국 금융시장이 붕괴 직전에 몰려 전세계 금융시장까지 동반 추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돈이 미국에서 빠져나가기는커녕 미국으로 계속 들어왔던 것이다. 세계 경제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금융위기 동안 일어난 일은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다. 미국이 초래한 금융시장의 공황 속에서도 미국 달러화는 여전히 궁극적인 안전자산으로 여겨졌다.

 사실 위기 때 일어난 현상은 달러화가 최근 수년간 어떻게 움직여왔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일 뿐이다. 전세계 금융시장의 리스크를 나타내는 지표로 시카고 옵션거래소의 변동성지수, VIX라는 것이 있다. VIX는 향후 30일 동안 주식시장의 변동성에 대한 시장의 기대치를 보여준다.

 공포지수라고도 불리는 VIX는 주요 국가나 주요 경제구역의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져 전세계에 파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되면 급등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 금융시장이 붕괴 직전에 몰련던 2008년 10월에 VIX는 사상최고치까지 올라갔다. 유로존의 채무위기가 고조됐던 2010년 6월과 미국 정치권이 채무 한도 증액을 둘러싼 교착 상태를 끝내고도 재정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해법을 내놓지 못했던 2011년 9월에도 VIX는 큰 폭으로 뛰어올랐다.

 놀라운 점은 VIX 상승이 미국 금융시장에 대한 우려 때문이든 다른 국가의 금융시장에 대한 불안 때문이든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는 사실이다. VIX가 급등하는 시기를 전후해 수개월간 대규모 자금이 미국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렇게 유입된 돈은 보통 국채에 투자되어 국채 수익률을 떨어뜨린다. 미국의 금리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자금이 유입된다는 것은 달러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결과 다른 통화와 비교한 달러화 가치는 올라가게 된다.

 간단히 말해 달러화는 금융시장이 곤경에 처했을 때, 비록 문제의 진원지가 미국이라 할지라도 가장 선호되는 피난처이다. 이런 상황은 누구라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외국 자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은 안전한 피난처가 되기는 커녕 극히 취약한 곳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달러트랩'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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